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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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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1560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개혁 신학자이다. 그는 마르부르크, 라이덴, 바젤, 제네바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장 칼뱅의 후계자인 테오도르 드 베즈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아르미니우스는 암스테르담에서 목사로 활동하며 예정론에 대한 칼뱅주의적 입장에 의문을 제기했고, 이는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와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그는 자유 의지와 보편적 대속을 강조하는 알미니우스주의 신학의 기초를 다졌으며, 그의 사상은 웨슬리안 알미니우스주의 등 다양한 신학적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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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

2. 출생과 성장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1559년 또는 1560년네덜란드 아우디워터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야코부스 헤르만스존(Jacobus Hermanszoon)이다.[1]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개혁교회 목사인 테오도루스 아에밀리우스에게 입양되어 자랐다. 1575년 오우데바터 학살로 어머니를 잃었다.

2. 1. 네덜란드에서의 유년 시절

1560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약 63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아우디워터에서 태어났다. 유아 때 부친이 사망하여 개혁교회 목사인 테오도루스 아에밀리우스에게 양육되었다. 15살에 그의 모친과 형제, 누이는 모두 스페인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1]

그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무기 제조업자였던 아버지 헤르만은 사망했고, 그의 아내는 어린 자녀들을 둔 미망인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어머니는 1575년 오우데바터 학살 당시 사망했다.

테오도루스 아에밀리우스는 개신교에 경도된 사제였는데, 그에게 입양되었다. 1572년경(오우데바터가 반군에게 정복된 해), 아르미니우스와 아에밀리우스는 위트레흐트에 정착했다. 젊은 야코부스는 아마도 히에로니무스 스쿨에서 공부했을 것이다. 1574년 또는 1575년 아에밀리우스가 사망한 후, 아르미니우스는 오우데바터 출신인 수학자 루돌프 스넬리우스와 알게 되었다. 후자는 아르미니우스를 마르부르크로 데려갔고, 그가 가르치던 라이덴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1576년 아르미니우스는 새로 개교한 라이덴 대학교에서 교양 교육 학생으로 등록했다.

3. 교육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말버그 대학교(1575), 레이던 대학교(1576-1581), 바젤 대학교(1582), 장 칼뱅이 세운 제네바 대학교(1582, 1584-1586)에서 공부하였다. 장 칼뱅의 후계자 테오도르 베즈에게 교육을 받았다.[1] 그의 학문적 성공으로 암스테르담 상인 길드는 3년간의 학업을 지원하였다.

3. 1. 유럽에서의 신학 수업

레이던 대학교(1576-1581), 바젤 대학교(1582), 장 칼뱅이 세운 제네바 대학교(1582, 1584-1586)에서 공부했다. 장 칼뱅의 후계자 테오도르 베즈에게 교육을 받았다.[1] 1576년부터 1582년까지 레이던에서 자유 인문학 학생으로 등록하여 신학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신학 스승으로는 칼뱅주의자인 람베르투스 다나에우스, 히브리어 학자인 요하네스 드루시우스, 기욤 페게레, 요한 콜만이 있었다. 콜만은 높은 수준의 칼뱅주의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하나님을 "폭군이자 사형 집행자"로 만들었다고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이던 대학교는 확고한 개혁 신학을 따랐지만, 칼뱅주의 외에도 루터교, 츠빙글리주의, 재세례파의 영향도 받았다. 레이던의 한 목사(카스파르 쿨하에스)는 칼뱅에 반대하여, 시민 권력이 일부 교회 문제에 관할권을 가지며, 이단자를 처벌하고 처형하는 것은 잘못이며, 루터교, 칼뱅주의, 재세례파가 핵심 교리를 중심으로 연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빌레브로르트 스넬리우스는 학생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도록 장려하기 위해 라무스주의 철학을 사용했다. 이러한 사람들의 영향 아래 아르미니우스는 성공적으로 공부했고, 나중에 존 칼뱅의 지배적인 개혁 신학에 의문을 제기하는 신학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는 씨앗을 뿌렸을 것이다.

1582년, 아르미니우스는 테오도르 베자 아래에서 제네바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레이던 시절부터 익숙했던 라무스주의 철학적 방법을 사용한 것에 대해 압력을 받았다. 아르미니우스는 공개적으로 라메 철학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고, 이러한 어려운 상황 이후,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바젤로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뛰어난 학생으로 계속 두각을 나타냈다. 1583년 아르미니우스는 제네바 귀환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바젤의 신학부에서 그에게 박사 학위를 제안했다. 그는 젊다는 이유(당시 24세 정도)로 이 명예를 거절하고 베자 아래에서 제네바에서 학업을 마치기 위해 제네바 학교로 돌아갔다.

아르미니우스의 학업이 끝나고 그가 암스테르담에서 목회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자, 베자는 암스테르담의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 "...아르미니우스가 바젤에서 우리에게 돌아온 이후 그의 삶과 학식이 우리에게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었기에, 그가 굳건히 같은 길을 간다면 모든 면에서 최고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우리는 그가 그렇게 할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에게 사물을 이해하고 분별하는 데 모두 적합한 지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지성이 그가 부지런히 함양하는 경건함으로 규제된다면, 성숙한 나이와 경험으로 굳건해질 때,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르미니우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가 판단하기에, 여러분의 친절과 관대함을 받을 만한 젊은이입니다." (1585년 6월 3일, 베자가 암스테르담에 보낸 편지).

이 편지를 보면, 아르미니우스가 라무스 철학에 끌렸을 때의 초기 긴장은 사라졌고, 아르미니우스는 베자에게도 훌륭하면서도 촉망받는 신학자로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3개월 후, 요한 그리나에우스는 바젤 대학교에서 다음과 같은 추천서를 보냈다.

> "경건한 독자들에게 문안을 드립니다. 학식과 경건에 대한 충실한 증언은 어떤 학식 있고 경건한 사람에게도 거절되어서는 안 되기에, 암스테르담 출신 야고부스 아르미니우스(James Arminius)에게도 거절되어서는 안 됩니다. ... (중략) ... 그러므로 저는 그를 모든 선한 사람들에게, 특히 명성 있는 도시 암스테르담의 하나님의 교회에 추천하며, 그 학식 있고 경건한 젊은이에게 관심을 가져, 그가 지금까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해 온 신학 연구를 중단할 필요가 없도록 정중히 간청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성경 문학 교수이자 신학부 학장 요한 야고부스 그리나에우스, 친필로 작성함. 바젤, 1583년 9월 3일.'"

17세기 아르미니우스 초상화, 하버드 신학대학원의 앤도버-하버드 신학 도서관의 네덜란드 초상화 컬렉션. J. C. 필립스와 J. G. 미트의 판화에서 발췌.


1603년, 그는 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레이던 대학교로 다시 불려갔다. 이는 1602년 프란시스쿠스 유니우스와 루카스 트렐카티우스 장로, 두 명의 교수가 거의 동시에 페스트 발병으로 사망한 후에 이루어졌다. 루카스 트렐카티우스 (2세)와 아르미니우스는 임명되었으며, 이 결정은 생존한 교수인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에게 크게 달려 있었다. 고마루스는 이단으로 의심받던 아르미니우스를 조심스럽게 승인했지만, 그의 도착은 논쟁을 종식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논쟁의 시기를 열었다. 이 임명은 또한 헤이그의 요하네스 위텐보가르트와 요한 판 올덴바르네펠트의 지원을 받는 정치적 측면도 있었다.

4. 활동

아르미니우스는 1587년 암스테르담에서 목사직을 수락하여 주일 및 주중 설교를 했고, 1588년 서품을 받았다. 그는 훌륭한 설교자이자 충실한 목사로 명성을 얻었다.

암스테르담 교회 법정은 아르미니우스에게 테오도르 베자의 초월 예정설을 반박하는 임무를 맡겼다. 초월 예정설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고 저주할지를 아무런 근거 없이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델프트의 두 목사는 이미 "로마서 9장에 가르쳐진 예정에 관한 논문에서 베자와 칼빈의 몇 가지 주장에 대한 답변"이라는 문서를 통해 베자와 디르크 폴케르츠존 코른헤르트를 반박하며, 구원 결정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지만 타락 이후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저변 예정설). 아르미니우스는 코른헤르트와 저변 예정설 신학 모두를 반박해야 했지만, 연구를 거듭할수록 갈등을 겪고 더 많은 시간을 연구에 할애하기로 결정했다.

1590년, 아르미니우스는 개신교 종교 개혁에 기여하고 최초의 개혁 교회 설립을 도운 암스테르담의 저명한 상인이자 시인이었던 라우렌스 야콥스 Reael의 딸 리스베트 Reael과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그는 명망 있는 인맥을 얻어 상업계와 상류 사회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그는 암스테르담의 교육 시스템을 조직하는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고, 1602년 역병이 돌 때는 감염된 집에 들어가 물을 주고 이웃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등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

4. 1. 목회 및 교수 활동

아르미니우스는 1588년부터 1603년까지 암스테르담에서 개혁파 목사로 사역했으며, 1603년부터 레이던 대학교의 신학 교수로 재임했다. 그는 벨직 신앙 고백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표현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존 칼뱅의 가르침을 계승한 테오도르 베자의 예정, 자유 의지, 은혜, 속죄, 성도의 견인에 관한 견해와 달랐다.

1582년, 아르미니우스는 테오도르 베자 아래에서 제네바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라무스주의 철학적 방법을 사용한 것에 대해 압력을 받아 공개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이후,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바젤로 옮겼다.[1] 그는 그곳에서 뛰어난 학생으로 계속 두각을 나타냈다. 1583년 바젤의 신학부에서 그에게 박사 학위를 제안했지만, 젊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베자 아래에서 학업을 마치기 위해 제네바 학교로 돌아갔다.

아르미니우스가 학업을 마치고 암스테르담에서 목회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자, 베자는 암스테르담의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칭찬하며, 그의 지성과 경건함을 높이 평가했다. 3개월 후, 요한 그리나에우스는 바젤 대학교에서 아르미니우스의 경건함, 절제, 학문에 대한 부지런함을 칭찬하는 추천서를 보냈다.

암스테르담 구 교회(Oude Kerk, Amsterdam). 아르미니우스가 1587년부터 1603년까지 목사로 재직했던 곳이다.


1587년 암스테르담에서 목사직을 수락한 아르미니우스는 주일 및 주중 설교를 했다. 1588년에 서품을 받았으며, 훌륭한 설교자이자 충실한 목사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암스테르담 교회 법정에서 베자의 초월 예정설 교리를 반박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연구를 거듭할수록 그 문제에 대해 갈등을 겪게 되었다.

1590년, 아르미니우스는 암스테르담의 저명한 상인이자 시인이었던 라우렌스 야콥스 Reael의 딸 리스베트 Reael과 결혼했다. 이 결혼을 통해 그는 명망 있는 인맥을 얻었고, 상업계와 상류 사회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그는 암스테르담의 교육 시스템을 조직하도록 위촉되었으며, 1602년 암스테르담을 휩쓴 역병 동안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1603년, 아르미니우스는 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레이던 대학교로 다시 불려갔다. 이는 프란시스쿠스 유니우스와 루카스 트렐카티우스 장로, 두 교수가 페스트로 사망한 후였다.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는 아르미니우스를 이단으로 의심하여 조심스럽게 승인했지만, 그의 도착은 논쟁을 종식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논쟁의 시기를 열었다. 이 임명에는 요하네스 위텐보가르트와 요한 판 올덴바르네펠트의 지원을 받는 정치적 측면도 있었다.

5. 신학 논쟁



디릭 코른헤르트가 이중예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이 문제에 반박할 인물로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가 선임되었으나, 오히려 그는 코른헤르트에게 설득되어 칼뱅주의의 이중 예정론에 반대하는 사상으로 전환하였다. 1603년 레이던 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취임한 후 예정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면서 논쟁을 촉발시켰다. 당시 레이던 대학교의 신학부 교수이자 철저한 칼뱅주의자였던 프란치스코 호마루스와 논쟁을 벌였다.

아르미니우스는 성령에 의해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예방적"(또는 선행적) 은혜에 대해 가르쳤고, 이 은혜는 "우리의 죄악된 부패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충분하며, 따라서 구원에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는 "구원에 충분한 은혜는 선택된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 모두에게 주어지며, 그들이 원한다면 믿거나 믿지 않거나, 구원받거나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윌리엄 위트는 "아르미니우스는 은혜에 대한 매우 높은 신학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은혜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 얻어지기 때문에 무상이라고 강조한다"고 말한다.

알미니우스주의 신학은 아르미니우스가 살아있는 동안 완전히 발전하지 않았지만, 그가 죽은 후(1609년) ''

5. 1. 칼뱅주의와의 갈등

디릭 코른헤르트가 이중예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이 신학적 문제에 반박할 인물로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가 선임되었으나, 오히려 그는 코른헤르트에게 설득되어 칼뱅주의의 이중 예정론에 반대하는 사상으로 전환하였다. 1603년 레이던 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취임한 후 예정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면서 논쟁을 촉발시켰다. 당시 레이던 대학교의 신학부 교수이자 철저한 칼뱅주의자였던 프란치스코 호마루스와 논쟁을 벌였다.

아르미니우스는 암스테르담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로마서에 대한 설교를 통해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발전시켰다. 1591년 로마서 7장을 해석하면서, 은혜와 거듭남을 통해 인간은 죄의 종노릇을 할 필요가 없으며, 로마서 7장 14절은 율법 아래 살면서 성령에 의해 죄에 대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부 반대자들로부터 그가 펠라기우스주의를 옹호한다는 비판을 받게 했다.

같은 해, 아르미니우스의 동료인 페트루스 플란시우스는 공개적으로 그와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이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 및 기타 정통 기준에 반하는 내용을 가르치지 않으며, 초기 교회의 신학자들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펠라기우스주의 이단을 완전히 부인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의 양심에 따라 성경 구절을 해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다. 암스테르담의 시장들은 평화를 유지하고 대중의 분열을 막기 위해 개입하여, 아르미니우스가 교회 평의회나 다른 단체와 상의하지 않고 당시 합의된 개혁 신학에 어긋나는 것을 가르치지 않도록 촉구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서 9장을 설교하면서 논쟁을 이어갔다. 그는 칼뱅주의적 해석에 직접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바울의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은혜, 예정, 자유 의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점차 발전시켜 나갔다.

1603년, 아르미니우스는 프란시스쿠스 유니우스 (장로)와 루카스 트렐카티우스 장로가 흑사병으로 사망한 후 레이던 대학교로 다시 초빙되어 신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의 임명은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의 결정에 크게 좌우되었으며, 요하네스 위텐보가르트와 요한 판 올덴바르네펠트의 지원을 받는 정치적 측면도 있었다.

고마루스는 예정론에 있어 초월 예정설을 지지했고, 아르미니우스와의 갈등은 이 점에 대한 논쟁에서 시작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벨기에 신앙 고백''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개정을 주장했지만, 논쟁이 공개적인 갈등으로 번지기 전까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1604년 2월 7일, 빌렘 바스팅기우스가 아르미니우스가 주재한 논쟁에서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을 옹호하면서 논쟁은 공개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고마루스는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와 디르크 볼케르츠존 코른헤르트를 언급하며 아르미니우스의 입장을 비판했다.

대학 밖의 아르미니우스 반대자들은 점차적으로 논란을 확대해 나갔다. 도르드레흐트의 교회 회의는 레이던 교회와 대학교에서 발생한 신학적 차이점에 대한 불만 사항을 작성했다. 이에 대해 레이던의 세 명의 신학 교수와 섭정은 교수들 사이에 근본적인 교리에 관한 어떠한 갈등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고마루스는 페스투스 홈미우스와 페트루스 플란시우스의 지원을 받아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반대를 더욱 강화했다. 익명의 논문들이 배포되며 아르미니우스를 이단으로 몰아갔다. 시브란두스 루베르투스는 외국 신학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아르미니우스를 공격했다.

1608년 4월, 아르미니우스는 홀란트 주 의회에 자신의 견해를 설명할 수 있는 허가를 요청했다. 5월 30일, 아르미니우스와 고마루스는 대법원 앞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었다. 대법원장은 두 교수의 차이점이 사소한 문제이며 공존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리고, 서로를 관용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고마루스는 법원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의 연설을 출판했으며, 아르미니우스도 자신의 연설을 출판했다.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변호하거나,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국가 또는 지방 시노드를 소집해 줄 것을 요청했다. 1608년 10월 30일, 아르미니우스는 의회에서 자신의 견해를 설명했다.

아르미니우스는 벨기에 신앙 고백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교수로서 자신은 레이던 큐레이터와 주 의회의 권한에만 복종하며 교회에는 복종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예정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며, 그것이 신앙 고백과 요리문답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고마루스는 1608년 12월 12일 의회에서 아르미니우스를 맹렬히 비난하며, 그를 펠라기우스주의예수회의 지지자라고 비난했다. 의회는 이러한 논쟁적인 어조에 불쾌감을 느껴, 두 사람의 연설 출판을 금지했지만, 연설은 곧 출판되었다.

1609년 7월, 아르미니우스가 주재하는 논쟁에서 로마 가톨릭 사제가 그의 입장에 반대하는 일이 발생했다. 고마루스는 이 광경을 보고 아르미니우스에게 교황주의의 문이 열렸다고 모욕적인 말을 했다.

6. 신학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주의의 예정론에 반대하며,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택하신다는 예지를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의 예정이 인간의 자유 의지를 배제한 채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칼뱅주의적 견해에 의문을 제기했다.[1] 타락 전 예정론과 타락 후 예정론 모두에 반대하며, 구원의 결정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구원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반응과 결단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인간의 공로에 의한 구원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역사학자 아더 로버트는 에라스무스, 디릭 코른헤르트, 아르미니우스를 서로 연결하며, 이성적 인본주의의 뿌리를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로 보았다. 헹크 봉거는 아르미니우스 이전에 이미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디릭 코른헤르트를 원조 알미니안주의자라고 주장한다.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주의 예정론을 디르크 볼케르츠존 코르네르트의 가르침에 대항하여 옹호하려다 칼뱅주의의 몇몇 측면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1] 칼뱅주의를 개혁하려 했고, 칼뱅주의 교리(무조건적 선택, 속죄의 제한적 성격,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일부에 저항하는 운동인 알미니우스주의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었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던 초기 네덜란드 추종자들은, 주류 칼뱅주의에 대한 다섯 가지 불일치점을 담은 문서인 ''항의서''(Remonstrantiæ, 1610)를 발표한 후 항의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Bona conscientia paradisus''" 즉, "선한 양심은 낙원이다"라는 좌우명을 가졌다.[1]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은 그가 죽은 후(1609년) ''항의서의 5개 조항]''(1610)을 통해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6. 1. 선행적 은총론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의 예정이 인간의 자유 의지를 배제하고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칼뱅주의적 견해에 의문을 제기했다.[1] 그는 타락 전 예정론과 타락 후 예정론 모두에 반대하며, 예정이 아닌 예지를 주장했다. 아르미니우스에 따르면,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구원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반응과 결단에 달려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인간의 공로에 의한 구원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선행적 은총론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시며, 이 은총을 통해 믿음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론이다. 아르미니우스는 성령께서 모든 사람에게 "예방적"(또는 선행적) 은혜를 부여하시며, 이 은혜는 "우리의 죄악된 부패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충분하며, 따라서 구원에 충분하다"고 가르쳤다.[1] 그는 "구원에 충분한 은혜는 선택된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 모두에게 주어지며, 그들이 원한다면 믿거나 믿지 않거나, 구원받거나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다.[1]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주의 예정론을 디르크 볼케르츠존 코르네르트의 가르침에 대항하여 옹호하려다 칼뱅주의의 몇몇 측면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1] 그는 칼뱅주의를 개혁하려 했고, 알미니우스주의 운동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었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던 초기 네덜란드 추종자들은 항의파로 알려지게 되었다.[1]

존 웨슬리는 웨슬리안 알미니우스주의의 창시자로, 칼뱅주의의 선택과 유기 교리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아르미니우스와 대체로 일치한다고 인정했으며, 알미니우스주의 신학을 받아들여 그 가장 저명한 옹호자가 되었다.[1]

6. 2. 가항력적 은혜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은혜가 불가항력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자유의지에 따라 믿음과 구원을 선택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1] 칼뱅주의의 예정론에 반대하며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했다.

아르미니우스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통해 "예방적"(선행적) 은혜가 주어진다고 가르쳤다. 그는 이 은혜가 "죄악된 부패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충분하며, 구원에 충분하다"고 보았다. 또한 "구원에 충분한 은혜는 선택된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 모두에게 주어지며, 그들이 원한다면 믿거나 믿지 않거나, 구원받거나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존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와 대체로 일치한다고 인정하며, 알미니우스주의 신학을 받아들여 그 옹호자가 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감리교인들은 알미니우스주의 신학을 따르며, 알미니우스주의는 미국에서 지배적인 신학 체계 중 하나가 되었다.

6. 3. 보편적 대속

아르미니우스는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보편적 대속을 주장했는데, 이는 칼뱅주의의 제한적 속죄와 대조를 이룬다.[1] 그는 칼뱅주의 예정론을 디르크 볼케르츠존 코르네르트의 가르침에 대항하여 옹호하려다 칼뱅주의의 몇몇 측면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자신의 견해의 일부를 수정했다. 그는 칼뱅주의를 개혁하려 했고, 알미니우스주의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었다. 알미니우스주의는 칼뱅주의 교리(무조건적 선택, 속죄의 제한적 성격,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일부에 저항하는 운동이다.

7. 아르미니우스 신학의 영향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주의의 예정을 디르크 볼케르츠존 코르네르트에 대항하여 옹호하려다 칼뱅주의의 몇몇 측면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자신의 견해를 일부 수정했다.[1] 그는 칼뱅주의를 개혁하려 했고, 그의 이름을 딴 알미니우스주의는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저항할 수 없는 은혜 등 칼뱅주의 교리의 일부에 저항하는 운동이었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던 초기 네덜란드 추종자들은 주류 칼뱅주의에 대한 다섯 가지 불일치점을 담은 문서인 ''항의서''(Remonstrantiæ, 1610)를 발표한 후 항의파로 알려지게 되었다.[1]

아르미니우스는 성경에서 증명될 수 있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덕을 세우는 것만을 가르치려 했다.[1] 그의 좌우명은 "선한 양심은 낙원이다"(Bona conscientia paradisusla)로 알려져 있다.[1]

아르미니우스는 성령에 의해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예방적"(또는 선행적) 은혜를 가르쳤고, 이 은혜는 "우리의 죄악된 부패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충분하며, 따라서 구원에 충분하다"고 보았다.[1] 그는 "구원에 충분한 은혜는 선택된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 모두에게 주어지며, 그들이 원한다면 믿거나 믿지 않거나, 구원받거나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다.[1]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은 아르미니우스가 살아있는 동안 완전히 발전하지 않았지만, 그가 죽은 후(1609년) ''항의서의 5개 조항''(1610)이 그 사상을 체계화하고 공식화했다.[1] 그러나 알미니우스의 신학을 정죄하기 위해 소집된 칼뱅주의 도르트 종교회의(1618–19)는 알미니우스의 신학과 그 추종자들을 저주로 선언하고, 칼뱅주의 5대 강령을 정의했으며, 네덜란드에 남아있던 알미니우스주의 목사들을 박해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의파는 홀란드에서 별개의 교회로 계속 존재했고, 칼뱅주의가 가르쳐지는 곳에서 알미니우스주의는 끊임없이 고개를 들었다".[1]

라이덴(1629)과 프랑크푸르트(1631 및 1635)의 출판업자들은 아르미니우스의 라틴어 작품을 출판했다.

존 웨슬리(1703–91)는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로, 칼뱅주의적 선택과 유기 교리에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의 사상 체계는 웨슬리안 알미니우스주의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기초는 웨슬리와 그의 동료 설교자 존 윌리엄 플레처에 의해 마련되었다.[1] 웨슬리는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의 신념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아르미니우스와는 별개로 자신의 종교적 견해에 도달했지만, 말년에 1778년에 발행된 ''아르미니우스 잡지''를 통해 자신과 아르미니우스가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을 인정했다.[1] 그는 알미니우스주의 신학을 받아들였고, 그 가장 저명한 옹호자가 되었다.[1] 오늘날 대부분의 감리교인들은 알미니우스주의 신학에 헌신하고 있으며, 알미니우스주의 자체는 존과 찰스 웨슬리의 영향력에 힘입어 미국에서 지배적인 신학 체계 중 하나가 되었다.[1]

7. 1. 계승

시몬 에피스코비우스, 요한네스 위텐보가에르트, 휴고 그로티우스는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을 계승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1] 아르미니우스는 디르크 볼케르츠존 코르네르트에 대항하여 칼뱅주의의 예정을 옹호하려다가 칼뱅주의의 일부 측면에 의문을 품고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였다. 그는 칼뱅주의를 개혁하려 했고, 그의 이름을 딴 알미니우스주의는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와 같은 칼뱅주의 교리에 저항하는 운동이 되었다.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따르던 초기 네덜란드 추종자들은 주류 칼뱅주의에 대한 다섯 가지 불일치점을 담은 문서인 ''항의서''(Remonstrantiæ, 1610)를 발표한 후 항의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성경에서 증명될 수 있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덕을 세우는 것만을 가르치려 했다고 썼다. 그의 좌우명은 "선한 양심은 낙원이다"(Bona conscientia paradisusla)로 알려져 있다.

아르미니우스는 성령에 의해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예방적"(또는 선행적) 은혜를 가르쳤고, 이 은혜는 "우리의 죄악된 부패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충분하며, 따라서 구원에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는 "구원에 충분한 은혜는 선택된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 모두에게 주어지며, 그들이 원한다면 믿거나 믿지 않거나, 구원받거나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은 아르미니우스가 살아있는 동안 완전히 발전하지 않았지만, 그가 죽은 후(1609년) ''항의서의 5개 조항''(1610)이 그 사상을 체계화하고 공식화했다. 그러나 알미니우스의 신학을 정죄하기 위해 소집된 칼뱅주의 도르트 종교회의(1618–19)는 알미니우스의 신학과 그 추종자들을 저주로 선언하고, 칼뱅주의 5대 강령을 정의했으며, 네덜란드에 남아있던 알미니우스주의 목사들을 박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의파는 홀란드에서 별개의 교회로 계속 존재했고, 칼뱅주의가 가르쳐지는 곳에서 알미니우스주의는 끊임없이 고개를 들었다.

존 웨슬리(1703–91)는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로, 웨슬리안 알미니우스주의로 알려진 그의 사상 체계는 웨슬리와 그의 동료 설교자 존 윌리엄 플레처에 의해 기초가 마련되었다. 웨슬리는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의 신념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지만, 말년에 ''아르미니우스 잡지''를 통해 자신과 아르미니우스가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알미니우스주의 신학을 받아들였고, 가장 저명한 옹호자가 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감리교인들은 알미니우스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으며, 알미니우스주의 자체는 존과 찰스 웨슬리의 영향으로 미국에서 지배적인 신학 체계 중 하나가 되었다.

7. 2. 반대

프란시스쿠스 유니우스, 프란시스 고마루스, 윌리암 퍼킨스 등 여러 신학자들이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에 반대했다. 아르미니우스는 디르크 볼케르츠존 코르네르트에 대항하여 칼뱅주의 예정론을 옹호하려다 칼뱅주의의 몇몇 측면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자신의 견해를 일부 수정했다.[1] 그는 칼뱅주의를 개혁하려 했고, 알미니우스주의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었다. 알미니우스주의는 무조건적 선택, 속죄의 제한적 성격, 저항할 수 없는 은혜 등 칼뱅주의 교리의 일부에 저항하는 운동이었다. 그의 초기 네덜란드 추종자들은 주류 칼뱅주의에 대한 다섯 가지 불일치점을 담은 문서인 ''항의서''(Remonstrantiæ, 1610)를 발표한 후 항의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성령에 의해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예방적"(또는 선행적) 은혜를 가르쳤고, 이 은혜는 "우리의 죄악된 부패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충분하며, 따라서 구원에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는 "구원에 충분한 은혜는 선택된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 모두에게 주어지며, 그들이 원한다면 믿거나 믿지 않거나, 구원받거나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은 아르미니우스가 살아있는 동안 완전히 발전하지 않았지만, 그가 죽은 후(1609년) ''항의서의 5개 조항''(1610)이 그 사상을 체계화하고 공식화했다. 그러나 알미니우스의 신학을 정죄하기 위해 소집된 칼뱅주의 도르트 종교회의(1618–19)는 알미니우스의 신학과 그 추종자들을 저주로 선언하고, 칼뱅주의 5대 강령을 정의했으며, 네덜란드에 남아있던 알미니우스주의 목사들을 박해했다.

존 웨슬리(1703–91)는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로, 웨슬리안 알미니우스주의로 알려진 그의 사상 체계는 웨슬리와 그의 동료 설교자 존 윌리엄 플레처에 의해 마련되었다. 웨슬리는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의 신념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지만, 말년에 ''아르미니우스 잡지''를 통해 자신과 아르미니우스가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알미니우스주의 신학을 받아들였고, 그 가장 저명한 옹호자가 되었다.

8. 사후 평가 및 영향

아르미니우스는 레이던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학생들에게 존경받았다.[1]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와의 갈등은 칼뱅주의 내에서 큰 분열로 이어졌다. 아르미니우스를 지지한 인물로는 아드리안 보리우스가 있었고, 페스투스 호미우스는 그를 반대했다.

아르미니우스의 친구, 제자, 지지자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
요하네스 드루시우스
콘라트 포르스티우스
안토니우스 티시우스
요하네스 할스베르기우스
페트루스 베르티우스
요하네스 아르놀디 코르비누스
렘베르트
시몬 에피스코피우스



레이던에서 그의 후임자는 포르스티우스였는데, 그는 과거 아르미니우스의 저술에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국가들은 증가하는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시노드를 소집하지 않고, 1609년 8월 13~14일 헤이그에서 고마루스와의 회의를 열었다. 8월 18일에 회의가 다시 열리기로 했으나, 아르미니우스의 건강이 악화되어 레이던으로 돌아갔다. 국가들은 회의를 중단하고 두 사람에게 상대방의 관점에 대한 서면 반응을 요청했다.

아르미니우스는 1609년 10월 19일 레이던의 피터스커르코프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하여 레이던의 피터스케르크에 묻혔다. 1934년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성 베드로 교회, 레이던에 있는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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